티스토리 뷰
목차
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환영받았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무시당했다고 느낍니다. 《더 초즌 시즌3 7화 — 들을 귀》는 바로 그 장면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데가볼리에서 잔치 비유를 전했다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분노를 동시에 산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 장면이 특히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잔치 비유가 불러온 충돌
안드레와 빌립이 데가볼리에서 선택한 이야기는 누가복음 14장의 대연회(大宴會) 비유였습니다. 여기서 대연회 비유란, 주인이 큰 잔치를 베풀고 먼저 초대한 손님들이 밭과 소와 결혼을 이유로 모두 거절하자, 결국 거리의 가난한 자와 장애인, 그리고 성 밖 길가의 낯선 이들까지 불러들이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 "원래 손님이 안 오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데려와 집을 채운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유대인과 이방인이 뒤섞인 군중 앞에서 꺼냈다는 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불러들이자는 말이냐"고 반발했고, 이방인들은 "우리를 거리의 찌꺼기 취급하는 거냐"며 분개했습니다. 예레미야를 따르는 보수주의자들은 원래 초대받은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고, 이사야에 능통한 이들은 오히려 새 시대의 도래로 읽었습니다. 유다가 한눈에 정리해 주는 장면이 있는데, 직접 겪어보니 말 한 마디가 청중의 수만큼 다르게 해석된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저도 한 단체방에서 같은 기사 링크를 올렸다가 진영에 따라 정반대 반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낀 건, 사람들은 정보를 먼저 처리하는 게 아니라 '누가 한 말인가', '내 편인가 아닌가'를 먼저 판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화에서 데가볼리 군중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 유대인: "이방인을 우선시한다"고 오독
- 이방인: "우리를 2등 시민 취급한다"고 오독
- 보수주의자: "원래 택함받은 자가 배제된다"고 공포
- 이사야 계열: 새 질서의 도래로 읽고 오히려 고무됨
마태의 테켈레트와 배제의 기억
이 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멈춘 장면은 마태와 헤스론의 만남이었습니다. 노인 헤스론은 가버나움 세무서에 나타나 가족의 빚을 모두 자기 명의로 돌려놓은 상태였습니다. 이건 일종의 대리 부채 이전(負債 移轉)으로, 법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본인이 로마 노동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각오한 행위였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신체와 자유를 담보로 자식들의 빚을 전부 떠안은 것입니다.
그 노인이 마태에게 건넨 것이 바로 테켈레트(tekhelet)로 물들인 옷술, 즉 치칫(tzitzit)이었습니다. 치칫이란 유대인이 율법에 따라 옷 네 귀퉁이에 다는 술로, 히브리어 철자의 수치(數値) 600에 매듭 13개를 더하면 율법의 613계명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노인은 이 치칫을 "금보다 가치 있고 루비보다 귀한 것"이라고 했고, 마태에게 팔지 말고 간직하라고 건넸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 장면이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해석을 들으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노인은 네가 믿음을 가지기를 바란 것이고, 그게 그분의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말합니다. 세리로 살며 공동체로부터 배제(排除)당했던 마태가 그 술을 받아 옷에 달고 다시 유대인으로 선언되는 순간, 저는 꽤 오래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 본문에 없는 드라마적 창작이지만, 민수기 15장 38~40절에 나오는 치칫 계명의 핵심 —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라 — 을 마태라는 인물을 통해 살아 있는 방식으로 구현했습니다.
구원은 비둘기처럼 예고 없이 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마태에게 털어놓는 고백은 이 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한 대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날이 사실 삶을 끝내기로 결심했던 날이었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다 비둘기 한 마리를 따라간 것이 전부였다고 말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고백이 드라마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앞에서 그 인물의 무게가 충분히 쌓여 있어야 하는데, 마리아는 시즌 내내 그 무게를 조용히 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마태에게 건네는 말은 구원론(救援論)의 언어로 말하자면 은혜의 선행성(先行性), 즉 인간이 준비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움직인다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의 선행성이란 구원이 인간의 자격이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는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마리아의 비둘기, 헤스론의 치칫, 예수님의 에바다(Ephphatha, "열리라") — 이 화에 등장하는 모든 구원의 순간은 당사자가 청하기 전에 먼저 찾아왔습니다.
아르고의 치유 장면도 같은 구조입니다. 텔레마코스가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여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이라고 말하며 먼저 다가갑니다. 에바다, 곧 "열리라"는 아람어 한 마디에 평생 닫혀 있던 귀가 열립니다. 마가복음 7장 31~37절에 기록된 이 사건은 드라마에서 데가볼리의 갈등 한복판에 배치됩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협상이 아니라 한 개인의 귀를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몬이 에덴의 유산(流産)을 요한에게 털어놓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는 믿는 게 아니라 안다"고 했던 시몬이, 그분이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않으셨다며 무너집니다. 이 장면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믿음이 고통을 면제해 준다는 착각을 정면으로 부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신앙의 균열 장면을 드라마가 회피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초즌 7화에서 잔치 비유가 왜 그렇게 큰 갈등을 만들었나요?
A. 청중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인 상태에서 "원래 초대받은 손님 대신 길가의 사람들을 데려온다"는 내용이 각자 자신이 배제되는 쪽이라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 소속과 두려움에 따라 전혀 다른 위협으로 해석된 것입니다. 드라마는 이것이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자의 마음 상태 문제임을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Q. 마태가 받은 옷술(치칫)이 성경에 나오는 건가요, 드라마 창작인가요?
A. 치칫(tzitzit) 계명 자체는 민수기 15장에 나오는 실제 성경 내용이고, 테켈레트 파란색 실을 섞어 만드는 관습도 실재했습니다. 다만 마태가 헤스론이라는 노인에게 치칫을 받고 마리아를 통해 옷에 달게 되는 이 구체적인 장면은 드라마의 창작입니다. 성경 팩트와 픽션을 구분하면서 보면 오히려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Q. 에바다(Ephphatha)는 실제로 무슨 뜻인가요?
A.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7장 34절에 예수님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칠 때 직접 쓰신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예수님이 아르고에게 이 말을 하는 장면은 성경 본문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Q. 시몬이 에덴의 유산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한 건가요?
A. 시몬 스스로 "너무 화가 나서 삭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분노와 의심을 겉으로 드러내기가 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는 시몬의 이 침묵을 나약함이 아니라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균열로 그려 냅니다.
결론
《더 초즌 시즌3 7화》가 남기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저는 지금 듣고 있는가, 아니면 판정하고 있는가. 잔치 비유의 실패는 말씀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소속과 상처가 귀보다 먼저 반응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태의 치칫, 마리아의 비둘기, 아르고의 에바다는 모두 자격을 갖춘 이후에 찾아온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닫힌 귀와 무너진 마음 앞에 먼저 도착한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이 화를 보고 나서 저는 며칠 동안 단체방에서 조용히 있었습니다. 틀렸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보다, 상대가 왜 그렇게 들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려고 했습니다. 거창한 실천은 아니었지만, 그게 이 드라마가 제게 준 작은 변화였습니다. 다음 화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