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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에피소드를 보기 전까지, 드라마가 성경 본문을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더 초즌 시즌4 3화는 안식일에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웃시야를 예수님이 고치시는 장면에서 시작해, 바리새인과의 정면 충돌, 그리고 라마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납니다. 보는 내내 "이 장면이 지금 나에게도 묻고 있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맹인 치유 — 기적을 봐도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은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고 웃시야의 눈에 바른 뒤,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웃시야가 씻고 나자 세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날 때부터 한 번도 빛을 본 적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본 그 장면은, 제가 직접 보면서도 목이 메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기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안식일 규례(Sabbath observance) 위반을 문제 삼습니다. 안식일 규례란 유대 율법에서 안식일(토요일)에는 노동과 치료 행위를 금지하는 원칙인데, 이들은 웃시야가 눈을 뜬 사실보다 예수님이 진흙을 만든 행위에 더 집중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저는 직장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했다가 "절차를 어겼다"는 이유로 묻혀버린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내용보다 형식을 앞세우는 태도, 이건 2천 년 전 예루살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웃시야는 회당에서 심문을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죄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멀었던 내 눈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 고백은 드라마적 연출이지만, 요한복음 9장 25절의 기록을 그대로 살린 것입니다(출처: Bible Gateway, 요한복음 9장). 경험에서 나온 확신은 논리로 꺾기 어렵다는 걸, 웃시야가 보여줬습니다.
- 예수님은 진흙을 눈에 바르는 방식으로 치유하셨는데, 이는 안식일 치료 금지 규례와 충돌하는 행위였습니다.
- 바리새인들은 기적 자체보다 형식 위반에 집중하며 웃시야를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 웃시야의 고백 "나는 전에 맹인이었으나 지금은 본다"는 요한복음 9장 25절을 직접 인용한 대사입니다.
바리새인 충돌 — 권위와 진실 사이
이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셈하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도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내용을 드라마가 현장 설교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출처: Bible Gateway, 누가복음 11장).
여기서 신성모독(blasphemy)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신성모독이란 하나님의 이름이나 권위를 훼손하는 말과 행위를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율법에서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아키바 랍비와 요시야 랍비는 예수님의 발언 하나하나를 받아 적으며 공회(산헤드린)에 보고하려 했습니다. 산헤드린이란 당시 유대 최고 종교 의회로, 율법 해석과 재판권을 가졌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장면이 단순히 종교적 다툼을 묘사하는 것 이상이라고 봅니다. 권위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구조는 오늘의 조직 문화에서도 자주 만납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보이는데, 기득권을 가진 쪽이 항상 악인이라기보다는, 각자가 자기 렌즈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이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지키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을 테니까요.
드라마는 극적 긴장감을 위해 바리새인과 로마 관리의 갈등 구도를 세밀하게 재구성했습니다. 성경 원문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지는데, 이 점을 두고 "성경을 과도하게 각색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핵심 메시지는 원문과 일치하고, 극적 재구성이 오히려 이해를 도왔습니다.
라마의 죽음 — 믿음은 보호막이 아니다
솔직히 저는 라마가 이 에피소드에서 죽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도마와의 키두신(kiddushin) 준비 장면이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키두신이란 유대 전통 혼인 절차의 첫 단계로, 신랑이 신부에게 예물을 주고 케투바(ketubah, 혼인 계약서)를 작성하며 공식적인 약혼 관계를 맺는 의식입니다. 해시계를 선물하며 "너와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던 도마의 고백은, 그래서 더 가혹하게 느껴졌습니다.
라마는 광장에서 군중이 밀리는 혼란 속에 쓰러졌고, 도마는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매달립니다. "이건 잘못됐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 절박함이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아니니라"라고 하셨고, 라마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도마에게 "그분 옆에 있어. 그거면 돼"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믿음이 삶을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통념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선생님을 따르던 라마가 왜 이렇게 됐는가. 극 중 다윗이 밧세바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슬퍼도, 기뻐도, 다시 슬퍼도. 그런 게 바로 믿음이오." 믿음은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붙들고 가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이 두 장면에서 겹쳐 보였습니다.
~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라마의 죽음이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제자들이 앞으로 겪을 더 큰 상실을 예비하는 장치로 읽혔습니다. 도마는 이 에피소드 이후 어떻게 변할까요. 그 변화가 다음 에피소드에서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 진영 논리와 진실 사이에서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했던 건 한국 사회 이야기입니다. 2026년 현재 정치적 진영 대립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낙인찍는 방식이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아키바 랍비가 웃시야를 회당에서 쫓아내던 장면이, 어딘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성경의 사건을 특정 정치세력에 직접 대입하는 건 조심스럽다고 봅니다. 성경은 특정 편을 지지하는 문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진영 논리에 빠지면 정작 나 자신이 바리새인의 자리에 있다는 걸 놓치기 쉽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상대방을 바리새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저도 이미 그 구도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같습니다. "나는 권위와 편견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진실을 보고 따르는 사람인가." 웃시야처럼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자신이 경험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도마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도 "그분 옆에 있겠다"고 결단하는 자세. 이 두 가지가 오늘 이 드라마가 제게 남긴 숙제였습니다.
살로메가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자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뭐든 구해도 된다"는 말씀을 자기 욕심의 근거로 삼는 모습은, 신앙을 개인 성공의 도구로 쓰는 오늘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선한 의도도 방향이 잘못되면 왜곡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초즌 시즌4 3화에서 맹인 웃시야 치유 장면은 성경 어디 나오나요?
A.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진흙을 눈에 발라 실로암 못에서 씻게 하셨다고 나오는데, 드라마는 이 장면을 웃시야라는 이름을 붙여 바나바·슐라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핵심 대사 "나는 맹인이었으나 지금은 본다"는 원문을 직접 살렸습니다.
Q. 더 초즌은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나요?
A. 핵심 사건과 주요 대사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지만, 인물의 감정선과 배경 상황은 드라마적으로 확장됩니다. 이에 대해 "각색이 지나치다"는 시각도 있고, "이해를 돕는 유익한 재구성"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성경 원문과 비교하며 보면 두 관점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Q. 시즌4 3화에서 라마가 죽는 건 성경에 나오는 내용인가요?
A. 라마는 드라마 오리지널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성경에 없는 창작 설정입니다. 다만 도마가 의심 많고 고통을 깊이 겪는 인물로 성경에 묘사되는 만큼, 드라마는 그 배경을 라마의 상실로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Q. 키두신, 케투바가 뭔가요? 드라마 이해에 필요한가요?
A. 키두신은 유대 전통 혼인의 첫 단계인 약혼 의식이고, 케투바는 그때 작성하는 혼인 계약서입니다. 이 개념을 알면 도마와 라마의 약혼 장면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법적인 결합의 시작임을 이해할 수 있어서, 이후 라마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Q. 산헤드린이 뭔가요? 당시 예수님을 체포할 권한이 있었나요?
A. 산헤드린은 당시 유대 최고 종교 의회로 율법 해석과 종교적 재판권을 가졌습니다. 다만 사형 집행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잡아도 실제 처형은 로마의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드라마에서 퀸투스와 바리새인이 얽히는 이유가 바로 이 구조 때문입니다.
결론
더 초즌 시즌4 3화는 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남겼습니다. "나는 기적 앞에서 형식을 먼저 보는가, 사람을 먼저 보는가."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상실 앞에서도 믿음을 붙잡을 수 있는가." 웃시야의 담대함과 도마의 무너짐이 같은 에피소드 안에 있다는 게, 이 드라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도마가 어떻게 이 상실을 안고 나아가는지 지켜볼 예정입니다. 믿음에 대한 질문을 이렇게 구체적인 인물과 이야기로 마주하게 해주는 드라마가 많지 않은데, 그래서 더 초즌은 계속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