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기적을 목격하고도 더 깊이 무너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적은 과연 모두를 위한 것일까요? 더 초즌 시즌4 7화는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성경 최대의 표적(sign) 장면을 다루면서도, 저는 내내 다른 곳에 눈이 멈췄습니다. 환호하는 무리 뒤편에서 항아리를 내던지고 주저앉은 도마의 얼굴이요. 교회에서 누군가의 기도 응답을 함께 기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럼 내 기도는?"이라고 삼켰던 그 봄밤이 겹쳐 보였습니다.
도마의 절규 — 기적 앞에서 더 깊어지는 상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보고 저는 솔직히 먼저 도마를 찾았습니다. 군중이 환성을 지를 때, 그는 "왜 저 사람은 되고 라마는 왜 안 됩니까?"라고 예수님께 정면으로 따집니다. 성경의 요한복음 11장(출처: YouVersion 성경)은 나사로의 부활에 집중하지만, 드라마는 그 기적의 이면을 파고듭니다. 라마와 도마의 갈등은 각색이지만, "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두시는가"라는 질문은 각색이 아닙니다.
저도 오래전 공동의회가 살벌해지던 어느 봄밤, 재정 문제로 교회가 쪼개질 뻔한 자리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기적 같은 회복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었고, 그 죄책감이 더 무거웠습니다. 드라마는 그 감정을 도마라는 인물에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신학적으로 이 장면은 테오디케(theodicy), 즉 선한 신이 허락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다룹니다. 여기서 테오디케란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신학의 오랜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즉각적인 해설을 주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내 곁을 지켜다오"라는 말만 남깁니다. 이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응답받은 쪽의 기쁨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이 불편함이 드라마의 솔직함이라고 봅니다.
작은 야고보가 평생 짊어온 육체적 고통도 같은 맥락에 놓입니다. 그는 남들을 치유하는 권능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절름발이는 고침받지 못했습니다. 드라마에서 그가 나사로 부활 당일 밤 통증으로 쓰러지는 장면은 짧지만, 기적과 고통이 같은 날 밤 한 지붕 아래 공존한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줍니다. "기적이 있다면 왜 이 고통도 있는가"라는 질문은 드라마 안에서 끝내 완전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 열린 결말이 제게는 오히려 더 진실하게 느껴졌습니다.
- 도마의 "왜 라마는 안 됩니까" 장면 — 테오디케(theodicy) 문제를 구어체로 직격
- 작은 야고보의 고통 — 기적과 고난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을 몸으로 보여줌
- 예수님의 응답 — 설명 대신 "곁에 있어달라"는 관계적 언어 선택
- 라마·도마 갈등은 각색이지만, 질문 자체는 신앙인의 보편적 고민
마리아의 시편 — 고통이 언어가 되는 순간
7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아 둔 장면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마태에게 자신의 글을 꺼내놓는 부분이었습니다. "낙서"라고 우기던 그 종이에는 어둠과 빛, 죽음과 부활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마태가 "양피지는 비싸잖아. 낭비할 처지가 아니잖아"라고 넌지시 말하는 순간 마리아는 결국 꺼냅니다. 오랜 친구에게만, 그것도 조심스럽게.
마리아가 읽어주는 구절은 다윗의 시편 형식을 따릅니다. 시편(Psalms)이란 히브리어 성경에서 기도와 찬양, 탄식을 담은 150편의 시가(詩歌) 모음입니다. 드라마 속 마리아는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와 예수님의 수난을 예견하듯 엮어 씁니다. "어둠은 빛이 없음이 아닙니다. 더 통제할 수 없고 더 해롭나이다."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면서 제가 신앙 안에서 겪었던 가장 막막했던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느꼈던 것을 이렇게 정확히 표현한 말을 본 게 처음이었습니다.
드라마는 마리아의 이 글쓰기를 단순한 감성적 삽입으로 두지 않습니다. 7화 마지막부분에서 글의 방향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향해 흐릅니다. "당신이 눈물을 흘리자 우리도 울었고, 결국 세상의 모든 빛이 꺼졌습니다"라는 구절은 요한복음 11: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을 출발점으로 삼아, 십자가 사건 전체를 예견하는 마리아의 시선으로 확장됩니다.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 원고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러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과, 마리아가 자신의 글을 마태에게만 공개하는 것은 대칭 구조를 이룹니다. 역사적 증거 자료로서 초기 기독교의 문서 전파를 다룬 연구(출처: BibleGateway, 요한복음 11장)에서도 확인되듯, 1세기 문서들은 공동체 안에서 신뢰 관계를 통해 먼저 공유되었습니다. 드라마의 이 설정은 역사적 개연성과 감정적 설득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시가 개인의 트라우마(trauma), 즉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남긴 심리적 상처를 언어로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그 해석도 틀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다만 드라마가 더 강조하는 것은 치유보다 증언(testimony)에 가깝습니다.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가진 채로 빛을 향해 돌아서는 것. "달콤함 속에 쓴맛이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초즌 시즌4 7화에서 도마가 항아리를 깨는 장면은 성경에 있나요?
A. 성경에는 없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 부활과 마르다·마리아의 반응에 집중하며, 제자들의 내적 갈등은 상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드라마의 각색이지만, "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두시는가"라는 도마의 질문은 성경이 다루는 테오디케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저는 이 각색이 성경의 행간을 솔직하게 채웠다고 생각합니다.
Q. 더 초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글쓰기 장면은 역사적 사실인가요?
A. 마리아 막달레나가 실제로 글을 썼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영지주의 문헌인 마리아 복음서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정경(canon)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입니다. 드라마의 이 장면은 창작이지만, 1세기 여성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증언의 역할을 했다는 점은 성경 본문 자체가 뒷받침합니다. 각색 여부보다 그 장면이 전달하는 주제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Q. 더 초즌 시즌4 7화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드라마에서 어떻게 설명되나요?
A. 드라마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와 단둘이 나누는 대화에서 "나도 다가올 일이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죽은 나사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곧 마셔야 할 잔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11:35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를 단순한 슬픔이 아닌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교차점으로 풀어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더 초즌에서 작은 야고보는 왜 치유를 받지 못하는 건가요?
A. 드라마 안에서도 이 질문은 완전히 답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전 시즌에서 야고보에게 "네 고통에는 목적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전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열어둡니다. 이 미해결의 상태가 오히려 신앙인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이해되지 않는 섭리"를 가장 정직하게 반영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열린 결말이 억지스러운 해피엔딩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고 느꼈습니다.
결론
더 초즌 시즌4 7화는 나사로 부활이라는 가장 극적인 표적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기적보다 기적을 둘러싼 사람들의 내면을 더 오래 들여다봅니다. 도마의 분노, 작은 야고보의 침묵, 마리아의 글쓰기. 세 장면 모두 "이해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가"라는 동일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다윗의 시편 13편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로 시작해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로 끝나는 그 구조가, 7화 전체의 호흡과 정확히 겹쳐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신 분이라면 도마의 항아리와 마리아의 시 중 어느 장면이 더 오래 남으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답이 지금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