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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22절.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를 굳이 '가롯 아닌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가룟 유다라는 배신자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죠. 처음 이 구절을 묵상했을 때, 저는 이 이름 하나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름만으로 오해받고, 이름만으로 가려지는 삶. 그게 꼭 2026년 한국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수많은 성도들의 이야기 같았거든요.
배신자의 그늘 속에서 손을 든 제자, 다대오
다대오(Thaddaeus)는 신약성경에서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복음서마다 이름이 다른 이유는 단순한 오류가 아닙니다. 마태·마가는 가룟 유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다대오라는 별명을 사용했고, 누가는 역사적 정확성을 우선해 본명을 그대로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기록에서 말하는 편집 의도(Redaktionsgeschichte), 즉 저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현 방식을 달리하는 기법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같은 사람을 왜 다르게 불렀을까'가 단순한 혼선이 아니라, 당대의 독자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였다는 걸 알았을 때요. 생각해보면 '유다'라는 이름 자체가 당시 히브리 문화권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의 매우 흔하고 영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배신 이후, 그 이름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낙인이 됩니다. 다대오는 아무 잘못 없이 이름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요한복음 14장 22절에서 던진 질문은 이렇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질문을 두고 '순수한 전도 열정'으로만 읽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읽힙니다. 다대오는 아마 예수님이 세상 앞에 능력과 영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메시아적 현현(Theophany), 즉 신이 인간 앞에 자신을 직접 나타내는 사건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신현(Theophany)이란 구약에서 하나님이 불기둥이나 구름 기둥처럼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나시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다대오의 머릿속에는 그런 장면이 그려졌을 겁니다. '왜 우리에게만 조용히 말씀하시고, 세상 앞에서는 폭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화려한 권능 과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 마태·마가복음: 가룟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 '다대오'라는 별명 사용
- 누가복음·사도행전: 역사적 정확성을 위해 본명 '야고보의 아들 유다' 사용
- 다대오의 이름 뜻: '사랑스러운 자', '찬양하는 자'(아람어 어원)
- 요 14:22의 질문 배경: 메시아 왕국의 가시적 현현을 기대한 유대적 세계관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서야 할 한국 교회의 전도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요즘 전도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교회 앞에 현수막을 걸고 전단지를 돌리면 새 가족이 왔습니다. 지금은 그 방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냅니다. 2024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 이유 1위는 '강요하는 전도 방식'이었습니다(출처: 한국갤럽). 저는 이 수치를 봤을 때 다대오의 질문이 겹쳐 보였습니다. '왜 세상에는 안 나타내시나이까'라는 열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길 원했는가가 문제였던 것처럼요.
오늘날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독교인이 묘사되는 방식을 보면,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강압적으로 전도하는 캐릭터이거나, 위선적인 지도자이거나. 이게 100% 왜곡이라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대오가 기대했던 '가시적 권능'의 현대판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규모, 숫자, 행사, 건물. 이것들이 복음 자체는 아니니까요.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가장 결정적인 방식은 십자가였습니다. 성경신학이란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추적하는 학문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복음 선포(Kerygma)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케리그마(Kerygma)란 초대 교회가 선포한 핵심 복음 메시지,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선언을 뜻합니다. 다대오의 이름 뜻인 '사랑스러운 자', '찬양하는 자'가 실제 삶의 방식이 될 때, 그게 진짜 케리그마입니다.
제 경우엔 이런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소그룹에서 함께 지내던 지인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줬을 뿐인데 나중에 "그때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다르다고 느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단지 한 장 없이, 구호 한 마디 없이. 그게 다대오의 이름이 살아내는 모습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국교회미래연구원의 2023년 보고서는 20~30대의 교회 이탈 원인으로 '진정성 부재'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습니다(출처: 한국교회미래연구원). 이 데이터는 저에게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경고처럼 읽혔습니다. 세상이 외면하는 건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포장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
자주 묻는 질문
Q. 다대오와 가롯 아닌 유다는 같은 사람인가요?
A. 네, 같은 인물입니다.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라는 별명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는 본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표현이 다른 이유는 저자마다의 편집 의도와 독자층의 차이 때문으로 봅니다.
Q. 요한복음 14장 22절 질문이 왜 중요한가요?
A. 이 질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다대오의 질문 속에는 세상에 가시적으로 권능을 드러내길 바랐던 기대가 담겨 있었고, 예수님은 그 기대를 '사랑과 순종'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이유도 그 반전 때문입니다.
Q. 오늘날 전도가 외면받는 이유가 뭔가요?
A. 한국갤럽 조사에서 비호감 이유 1위가 '강요하는 전도 방식'이었을 만큼, 메시지 자체보다 접근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순간들이었습니다.
Q. 다대오의 이름 뜻이 전도와 무슨 관계인가요?
A. 다대오는 아람어 어원으로 '사랑스러운 자', '찬양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이 단순한 호칭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가 될 때 복음이 전달된다는 점에서 오늘날 전도 방식과 직결됩니다. 이름을 살아내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진짜 전도입니다.
결론
다대오는 이름 때문에 설명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던진 질문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왜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시나이까." 저는 이 질문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방향이 조금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드러낼까'가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셨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강력한 복음이었습니다. 다대오의 이름처럼, 사랑스럽고 찬양하는 삶으로 세상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전도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강단에서 배운 말씀을 삶에서 조용히 살아내는 사람들, 그들이 다음 세대의 다대오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