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가롯 유다를 생각하면 곧장 '악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솔직히 성경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그를 단순히 희대의 악당으로 정리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더군요. 그는 12제자 중 재물을 맡길 만큼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고, 마지막엔 죄책감에 은 30냥을 내던졌습니다. 탐욕과 배신, 그리고 자책과 진정한 회개의 차이. 이 간격이 생각보다 훨씬 좁고도 치명적이었습니다.

탐욕과 배신 — 유다는 처음부터 악인이었을까
가롯 유다(Judas Iscariot)라는 이름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가롯'은 히브리어로 '그리욧 사람'을 뜻하며, 12제자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대 지방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그리욧(Kerioth)이란 구약 성경 아모스서와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유대 남부의 도시 이름으로, 유다의 출신 지역이 그를 '이방인 같은 제자'로 구별하는 단서가 된다고 보는 성경 학자들도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늘 유다는 처음부터 불순한 동기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처럼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는 열두 제자의 재무를 담당할 정도로 계산 능력이 뛰어나고 모두에게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요 13:29).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Messiah)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메시아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영혼의 구원자가 아닌 로마 압제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해방할 유능한 정치 지도자로 봤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유다의 마음속 기대는 조금씩 무너졌겠지요.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왔느냐가 핵심입니다. 제 경험상 신앙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파고드는 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집착입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spikenard)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 나르드 향유란 히말라야 원산의 식물에서 추출한 당시 최고급 방향제로, 노동자 1년치 임금에 맞먹는 가격이었습니다 — 유다는 "가난한 자를 위해 팔지 않고 낭비한다"며 항의했습니다(요 12:4-6). 그런데 성경은 그 이유를 '가난한 자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돈궤를 맡아 거기서 훔쳐왔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유다의 배신이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 유다는 12제자의 재무를 맡을 만큼 신임받던 인물이었습니다
- 예수님을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한 것이 배신의 뿌리였습니다
- 기대가 좌절되자 탐욕(물질)이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 은 30냥의 배신은 오랜 내면의 부패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자책과 회개 — 이 두 단어는 왜 이렇게 다를까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뒤 어떻게 됐는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7장 5절은 "유다가 뉘우쳐 은 30냥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전하고, 사도행전 1장 18절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몸이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두 본문을 처음 나란히 읽었을 때 저도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같은 사건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싶었거든요.
성경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마태는 유다의 내면적 자책(自責)과 도덕적 붕괴를, 누가(사도행전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외적 결과를 각각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모순이 아니라 각 저자의 신학적 관점이 담긴 기록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성경해석학(Hermeneutics)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기서 헤르메뉴틱스(Hermeneutics)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역사적·문학적·신학적 맥락에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을 뜻합니다(출처: Bible Gateway, Matthew 27:5).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가 보인 반응은 메타노이아(Metanoia)가 아니었습니다. 메타노이아란 헬라어로 '마음의 방향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 즉 진정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잘못했다는 감정적 후회나 자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유다는 은 30냥을 내던지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말했지만(마 27:4), 그 다음 행동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자책은 자신을 향하고, 회개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 방향의 차이가 유다의 비극을 완성시켰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오랫동안 봐온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 혼동입니다. 죄를 짓고 몹시 괴로워하는데, 그 괴로움이 결국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혐오와 체념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유다를 '극악무도한 악인'으로만 단죄하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거울일 수 있다고 봅니다. 2026년 현재 한국 교회가 직면한 세속화와 물질주의 문제도 결국 이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앙을 현세적 복이나 성공의 수단으로 소비하는 경향, 그리고 실패했을 때 회개 대신 절망으로 도망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유다를 인간적 갈등과 비극의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 해석이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건 사실이지만, 제 경험상 그 지점에서 멈추면 본질을 놓칩니다. 유다를 공감 가는 인물로 재조명하다 보면 자칫 그의 의도적인 배신과 회개의 부재가 지닌 엄중함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유다는 그것을 차버렸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가롯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 생각으로 제자가 된 건가요?
A. 성경 기록상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유다는 12제자의 재정을 맡길 정도로 신임받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정치적 해방자로 기대하며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대가 좌절되면서 탐욕이 자리를 잡았고, 그 끝에 배신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악의로 시작한 것보다 오히려 더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Q.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유다의 죽음이 다르게 기록된 이유가 뭔가요?
A. 두 본문이 모순이 아니라 각 저자의 신학적 강조점이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해석학(Hermeneutics)의 일반적 접근입니다. 마태는 유다의 내면적 자책과 도덕적 붕괴를, 누가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외적 결과를 각각 부각시킨 것입니다. 두 기록을 함께 읽을 때 오히려 더 입체적인 그림이 완성됩니다.
Q. 자책과 회개는 어떻게 다른가요?
A. 자책은 시선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회개(메타노이아)는 시선이 하나님을 향합니다. 유다는 죄를 뉘우쳤지만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고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뒤 통곡하고 다시 돌아섰습니다. 같은 실패라도 그 다음 방향이 전혀 달랐습니다.
Q. 오늘날 한국 교회와 유다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나요?
A. 유다가 예수님을 영혼의 구원자가 아닌 현세적 성공의 도구로 여겼듯, 오늘날 신앙을 복이나 성공의 수단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한국 교회 안에 적지 않습니다. 또한 실수나 죄를 짓고 나서 진정한 회개보다 자책과 절망으로 머무는 패턴도 유다의 마지막과 닮아 있습니다. 유다의 이야기가 2,000년 전 이야기가 아닌 이유입니다.
결론
가롯 유다의 비극을 다시 정리해보면, 그 끝은 배신이 아니라 돌아올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굳어진 마음에 있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며 가장 불편하게 느낀 점은, 유다가 나와 너무 멀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는 마음,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서기보다 자책 속에 웅크리는 패턴. 이것들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나 있습니다.
가롯 유다를 볼 때 단죄로 끝내기보다, 그 이야기를 거울 삼아 '자책을 회개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점검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봅니다. 진정한 메타노이아, 즉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이키는 회개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유다의 이야기에서 건져내야 할 가장 실제적인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