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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십 년 넘게 다니면서도 "나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라는 질문이 불쑥 올라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경 구절은 줄줄 외우는데, 정작 그 말씀이 심령 깊은 곳에 닿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이 조명하는 제자 빌립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그 시절 저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습니다.

공관복음이 말하지 않는 빌립의 다섯 장면
신약성경의 공관복음(Synoptic Gospels)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으실 겁니다. 여기서 공관복음이란 마태·마가·누가복음 세 권을 함께 묶어 부르는 말로, 세 권이 공통된 시각과 자료를 공유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세 복음서는 빌립을 열두 제자 명단에 이름 한 줄 올리는 것 이상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달랐습니다. 제가 직접 대조해가며 읽어봤는데, 요한복음에는 빌립이 등장하는 장면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부르심을 받는 장면(요한복음 1장 43절),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장면(1장 45절), 오병이어 현장에서 시험받는 장면(6장), 헬라인들을 예수님께 연결하는 장면(12장 21~22절), 그리고 최후의 만찬 다락방에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14장)까지입니다.
특히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병이어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빌립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라고요. 빌립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각 사람이 조금씩 받더라도 200데나리온의 떡도 부족합니다." 200데나리온은 오늘날 가치로 약 2,00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도 분명 같은 계산을 했을 겁니다.
요한복음이 빌립을 이렇게 세밀하게 기록한 이유는 단순한 전기적 서술이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출처: 대한성서공회). 빌립의 질문과 실수는 그 신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치였던 겁니다.
- 요한복음 1장 43절 —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
- 요한복음 1장 45절 — 나다나엘을 찾아가 메시아를 전도하는 장면
- 요한복음 6장 — 오병이어 현장에서 믿음을 시험받는 장면
- 요한복음 12장 21~22절 — 헬라인들을 예수님께 연결하는 장면
- 요한복음 14장 — 다락방에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
계산하는 신앙,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의 전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빌립의 이야기를 깊이 파고들었을 때, 저는 그를 단순히 '믿음이 약한 사람'으로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는 실용주의적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실용주의(Pragmatism)란 눈에 보이는 결과와 현실적 조건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빌립은 오병이어 현장에서 군중의 수와 필요한 식량, 그 비용까지 순식간에 환산해낼 만큼 냉철한 현실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계산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해법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다"고 기록합니다(요한복음 6장 6절).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명한 답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는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자며 수천 명의 기적 현장을 함께 목격했던 빌립이, 마지막 자리에서 "주님,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책망이었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요한복음 14장 9절). 제가 직접 이 구절 앞에 앉아봤는데, 그 책망이 정확히 저를 향한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빌립을 믿음 없는 실패자로만 읽는 것은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나다나엘을 찾아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을 만났다"고 외쳤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안드레와 함께 그들을 기꺼이 연결해주었습니다. 이런 장면에서 그는 따뜻하고 열린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복음 전도(Evangelism)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빌립은 의심을 품으면서도 전도의 삶을 멈추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영화 <벤허>의 원작자 루 월레스가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쓰려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빌립의 서사도 비슷합니다. 그의 약하고 계산적인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성경신학자들은 이 과정을 신앙의 점진적 성숙(Progressive Sanctification), 즉 성도가 은혜 안에서 단계적으로 거룩해져가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출처: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경험상 이 개념은 머리로 이해하기는 쉬워도, 실제 삶 속에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빌립을 다르게 다루는 이유가 뭔가요?
A.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행적을 공통된 자료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빌립의 의심과 질문이 오히려 예수님의 신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Q. 오병이어 사건에서 빌립의 대답이 왜 틀린 건가요?
A. 틀린 계산이 아니라 틀린 방향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문제의 해법을 알고 있는지를 물으신 게 아니라, 상황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200데나리온이라는 정확한 계산은 오히려 그의 신앙이 아직 현실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Q. 빌립은 결국 믿음이 성장한 사람인가요?
A. 성경은 최후의 만찬 이후 빌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1장에 빌립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그의 믿음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전체 흐름과 일치합니다.
Q. 오래 교회에 다녔는데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A. 제 경험상 출석 연수와 신앙의 깊이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습니다. 빌립도 3년을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흔들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보다 십자가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묵상하느냐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이 믿음을 바꾼다는 것을 저도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결론
빌립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나서, 저는 오래된 회의감이 부끄럽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심과 계산 속에서도 나다나엘에게 달려가고, 헬라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빌립처럼, 흔들리면서도 걷는 것이 신앙의 실제 모습일 수 있습니다.
2026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성도들의 질문을 억누르는 대신, 빌립처럼 질문하며 인격적인 만남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천천히 묵상하는 시간이 어설픈 질문들을 연단된 신앙으로 바꾸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