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이들 성경 공부 자료를 준비하다가 나다나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봤는데, 제가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 제자를 이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빌립의 친구,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던 사람. 그 짧은 장면 안에 신앙의 본질이 다 들어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누구인가 — 친구전도로 만난 제자
제가 직접 자료를 찾아보니, 나다나엘은 복음서마다 이름이 다르게 등장합니다.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에서는 '바돌로매(Bartholomew)'로 불리는데, 이 이름은 아람어로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돌로매란 히브리식 성(姓) 표기 방식으로, 아버지 이름 앞에 '바(bar, ~의 아들)'를 붙이는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나다나엘(Nathanael)'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집니다(출처: Bible Gateway, 요한복음 1장 43-51절).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경위는 꽤 인상적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친구 나다나엘에게 달려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전도, 즉 관계를 통한 복음 전달입니다. 여기서 친구전도란 제도적 전도가 아니라 삶 속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복음을 나누는 방식을 말합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빌립의 방식이 참 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강요도, 설교도 아닌 "나 진짜 신기한 사람 만났어, 같이 가보자"는 한 마디였거든요. 나다나엘은 처음엔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아가 나오겠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거기서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와 보라"고 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와 보라'는 두 글자가 때로는 긴 설명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 기도하는 사람을 알아보신 예수님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첫 만남 장면은 읽을수록 묘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처음 보자마자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당황한 나다나엘이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고 답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당시 이스라엘 문화에서 매우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무화과나무 아래는 단순한 그늘이 아니라 율법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개인 경건의 공간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묵상(默想)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되새기며 그분과 단둘이 대화하는 시간을 뜻합니다. 나다나엘에게 그 나무 아래는 오실 메시아를 갈망하며 기다리던 기도의 자리였습니다(출처: Britannica, Nathanael 항목).
제가 이 부분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기도의 순간을, 예수님은 이미 보고 계셨다는 사실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거든요. 나다나엘이 그토록 감격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자신이 늘 기도하며 기다리던 그분이, 바로 그 기도의 내용을 알고 계신 채로 자신 앞에 서 계셨으니까요. 그 순간 나다나엘은 즉각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무화과나무 아래 = 유대 전통의 개인 경건 기도 공간
- 예수님은 인간의 은밀한 기도 시간까지 알고 계심
- 나다나엘의 즉각적 신앙 고백은 이 확인에서 비롯됨
-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자를 의미
참 이스라엘 사람 — 간사함 없는 신앙의 의미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붙여주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성경신학적으로 '참 이스라엘(True Israel)'이란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 아래 살아가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혈통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로 정의되는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 나사렛에 대해 냉소적인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례되는 발언이기도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솔직함을 오히려 '간사함이 없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이게 제 경험상 꽤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이들이 "핸드폰 더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걸 기복적이라 단정하기보다,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꺼내 놓는 솔직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나다나엘의 '간사함 없음'은 꾸미지 않은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진심을 알아보셨습니다. 신앙의 출발점이 완벽한 경건함이 아니라 솔직한 마음이라는 것, 이 이야기가 그걸 보여줍니다. 제가 아이들 신앙 교육을 고민할 때마다 돌아오는 장면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중보기도로 나아가기 — 나만의 기도에서 타인을 향한 기도로
나다나엘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은 로마 지배 아래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도, 즉 철저히 공동체를 향한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였습니다. 여기서 중보기도란 자신이 아닌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제가 직접 어린이 주일학교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느낀 건, 기도 교육의 방향이 종종 두 극단 중 하나로 쏠린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조건 크고 거룩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거나, 반대로 개인적 필요만을 나열하는 데 머무는 경우입니다. ~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두 사이에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솔직한 기도를 존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내 친구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부모님이 평안하게 해주세요"로 넓혀가는 단계적 영성 지도가 지금 어린이·청소년 사역에서 훨씬 더 실효성 있는 접근입니다. 예수님도 나다나엘에게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작은 믿음 위에 더 큰 비전을 얹어주신 거죠. 제 경험상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아이들은 기도 자체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나다나엘과 바돌로매는 정말 같은 사람인가요?
A. 성경학자들은 두 이름이 동일 인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에는 바돌로매라는 이름만 나오고 나다나엘은 등장하지 않는 반면, 요한복음에는 나다나엘이 나오고 바돌로매는 나오지 않습니다. 두 이름이 항상 빌립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도 동일 인물설의 근거입니다. 바돌로매가 성(性)이고 나다나엘이 이름이라고 보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Q.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한다는 게 왜 그렇게 의미 있는 건가요?
A. 1세기 유대 문화에서 무화과나무 아래는 율법 학자나 경건한 유대인이 말씀을 묵상하고 개인 기도를 드리던 상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집 안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오늘날의 골방 같은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를 언급하셨다는 것은, 나다나엘의 가장 은밀한 신앙 행위까지 알고 계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그토록 감격한 것입니다.
Q. 아이들이 "핸드폰 더 하게 해주세요" 같은 기도를 해도 괜찮은 건가요?
A. 기도 교육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솔직한 기도를 교정 대상으로 보기보다 신앙의 출발점으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나다나엘도 처음엔 냉소적인 말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솔직함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아이들의 솔직한 기도를 인정하면서, 점차 가족과 친구를 위한 중보기도로 확장해 나가도록 함께 연습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방향입니다.
Q.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명이 맞나요?
A. 맞습니다. 나다나엘(바돌로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요한복음 21장에도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제자들 중에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 승천 이후 소아시아와 인도,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초기 교회 전승이 있습니다.
결론
나다나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서 제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건, 우리가 아이들의 기도를 너무 빨리 판단하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 냉소적이었고, 소박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혼자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작은 신실함을 보셨고, 거기서부터 '더 큰 일'을 약속하셨습니다.
아이들의 "핸드폰 기도"를 나무라기 전에, 그 솔직함이 신앙의 첫 걸음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점차 친구를, 가족을, 더 나아가 공동체를 품는 중보기도로 자랄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고, 제 경험상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