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7.아브라함의 믿음 (부르심, 순종, 언약)

기도하는예나아빠 2026. 8. 18. 21:41

목차


    솔직히 처음 창세기 12장을 읽었을 때 저는 이 장면이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히브리서 11장 8절의 표현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다 보니,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실패와 두려움 속에서도 한 방향을 잃지 않았는지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 세 종교가 모두 아버지라 부르는 인물, 아브라함.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제가 직접 정리해봤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 침묵을 가른 음성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는 기원전 2000년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손꼽히는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달의 신 난나를 섬기는 신전이 도시 한복판에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대대로 제사를 드리며 살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우상을 만들어 팔았다는 유대 전승이 전해질 만큼, 그 집안은 이 문화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됐는지, 저는 오랫동안 궁금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연대가 겹치므로 신앙이 전수됐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저는 이 부분에 조금 유보적입니다. 족보 연대 계산은 추정에 기반하고, 성경 본문이 직접 그 연결을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세기가 강조하는 것은 '왜 그가 믿었는가'가 아니라 '그가 들었을 때 순종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부르심은 간결합니다. "너의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목적지가 없었습니다. 기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75세에 이 음성을 듣고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부르심(Calling)'이란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과 미래 전체를 재편하는 신적 선언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데라를 만나 결심을 전했을 때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장면이 저는 인상 깊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 우르는 당시 최고 수준의 문명 도시였으며, 아브라함의 가족은 그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 창세기 12장의 부르심은 구체적 목적지 없이 '순종 자체'를 요구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 신약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 장면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느니라"고 평가합니다(출처: Bible Gateway, 히브리서 11:8).
    요약: 아브라함의 출발은 목적지도 기한도 없었지만, 그는 음성을 듣자마자 순종했고 그것이 믿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인간적 순종과 실패 — 완벽하지 않았던 믿음의 조상

    제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가장 예상 밖이었던 것은, 그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흔들렸다는 점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곧 기근이 닥쳤고, 아브라함은 결국 애굽(이집트)으로 피신합니다. 거기서 그는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 합니다. 신앙의 영웅이라 하기에는 꽤 민망한 장면입니다.

    이 대목을 두고 "아브라함의 약점이 오히려 이 이야기를 인간적으로 만든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도 그 견해에 동의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완성된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에 굴복하고, 기다림에 지쳐 하갈을 통해 스스로 후사를 만들려 하고, 그 결과로 가정 안에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스마엘(Ishmael)'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인데, 이는 하갈이 광야에서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이스마엘이란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자, 훗날 이슬람 전통에서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할례(Circumcision)'가 언약의 표시로 주어진 창세기 17장도 저는 다시 봤을 때 다르게 읽혔습니다. 여기서 할례란 외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에 육체가 결박되는 행위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몸에 새기는 서약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에 즉시 모든 남자에게 이를 시행했다는 사실은, 그가 수십 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결국 순종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아브라함의 '위대함'보다 그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신실함에 더 눈이 갔습니다.

    멜기세덱(Melchizedek)이 등장하는 창세기 14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멜기세덱이란 살렘 왕이자 제사장으로, 아무런 족보 없이 갑자기 등장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사라지는 인물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인물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합니다(출처: Bible Gateway, 히브리서 7:1-3).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일조를 그에게 바친 것은 대가도, 보상도 아닌 고백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정이요.

    요약: 아브라함은 실패와 두려움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언약을 철회하지 않으셨고 아브라함은 결국 순종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약의 완성 — 별처럼 많은 자손과 모리아산의 침묵

    제 경험상, 아브라함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창세기 22장, 즉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 장면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앞에 쌓인 수십 년의 기다림을 알아야 그 무게가 제대로 느껴집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밤하늘 아래로 이끌어 "하늘의 별을 세어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이 저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노년에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고, 그 상황에서 별을 세다가 압도되어 멈췄다는 묘사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성경은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의(Righteousness)'란 도덕적 완벽함이 아니라, 불가능 앞에서 하나님의 말을 붙잡는 태도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창세기 21장, 마침내 이삭이 태어납니다. 사라가 터뜨린 웃음은 조롱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의 기다림이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이삭(Isaac)'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그가 웃는다"는 뜻입니다. 불가능이 이루어졌을 때의 웃음.

    창세기 22장의 모리아산(Mount Moriah)은 이 여정의 정점입니다.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걸으며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 했을 때, 그 침묵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은 거짓말도, 회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짜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은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해석합니다. 부활(Resurrection), 즉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하다는 믿음을 그는 이미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창세기 15장의 별 세기 장면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원형으로 신약에서 여러 차례 인용됩니다.
    •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때 이루어진 사건으로,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를 넘은 기적으로 기록됩니다.
    • 모리아산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자리와 같은 위치로 전승되며, 유대교·기독교 모두에서 상징적 장소로 여겨집니다.
    요약: 별을 세다 멈춘 믿음, 불가능 앞에서의 웃음, 칼을 든 채 하나님을 믿은 순간 —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 세 장면에서 완성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아브라함이 우상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됐을까요?

    A. 성경 본문은 이 경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연대가 겹쳐 신앙이 전수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저는 이것이 흥미로운 추정이지만 정경 본문의 직접 근거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창세기가 강조하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됐는가'가 아니라, '들었을 때 순종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Q.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 속인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A. 이것은 창세기가 숨기지 않고 기록한 아브라함의 실패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니 완벽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이 장면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완벽함이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하나님이 언약을 거두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Q.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A. 언약의 계승자는 이삭으로 지정됐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두 아들이 함께 장례를 치렀다는 창세기 25장의 기록은 짧지만 의미 있습니다. 갈라진 길, 그러나 같은 핏줄이라는 것, 그 긴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Q.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모두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뭔가요?

    A. 유대교는 이삭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직접적 조상으로, 기독교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신앙의 원형으로,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선포한 선지자 이브라힘으로 각각 다르게 해석합니다. 같은 인물을 각자의 신학으로 읽는 것이기에, 세 전통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서 만나면서도 해석에서 갈라지는 구조입니다.

     

    결론

    아브라함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수정한 생각은, 이 사람을 '위대한 영웅'으로 읽으려는 시각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웠고, 지쳤고,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려다 더 큰 갈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75세에 부르신 그 언약을 끝까지 이루셨습니다.

    불확실성이 많은 시대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갈 바를 모른 채 첫걸음을 내딘 그 순간,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창세기부터 히브리서까지 이어지는 이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요약본으로는 느끼기 어려운 온도가 원문 안에 있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m5UJowerE&t=12s